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제의 이름을 잇다/등장인물 (문단 편집) === [[https://ko.wikipedia.org/wiki/이경업|서경업]][* 한동안 본인과 휘하 세력, 부여풍은 이경업이라 부르며 측천무후와 장안 조정에서는 그의 반란 초기에는 서경업으로 칭하다가 그가 10만의 의용군을 이끌고 장안 수비군에 합류하자 다시 이씨 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당이 몰락한 후 본인이 남조에서 새 왕조를 개창하며 다시 성을 서씨로 바꿨기에 작중 최종 명칭을 따라 서경업으로 표기한다.] === [[이세적]]의 손자이자 야심만만한 인물. 원 역사에서 10만이 넘는 인력을 끌어모아 난을 일으켰으나 측천무후의 진압군에게 패한 비운의 반란군 수장이다. 요서를 얻고난 소강 상태에서 연운 16주를 최소한의 소모로 돌파하기 위해 고뇌하던 부여풍이 떠올렸다. 비록 측천무후의 집권 후 자사직을 그만두고 양주 지역에서 살고 있었지만, 다른 공신가처럼 비참하게 죽거나 굴복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본래 반란의 시작은 684년이었이기에 674년인 작중 시점에는 제대로 준비도 되지 않았지만 그 구상은 물론 간부들인 낙빈왕, 당지기 등과 반란 모의는 이미 하고 있었다. 때문에 부여풍이 과거 3차 고당전쟁에서 이세적을 따라왔다가 포로가 된 이세적의 문객들을 통해 자신에게 동조할 것을 제안하자, 격하게 반발하면서도 답장에는 원하는 조건을 세세히 적어놓았다.[* 측천무후에게 휘둘리는 현 조정에 대한 불만, 약속을 지켜줄 지에 대한 불신과 매국노란 오명을 뒤집어 쓸 것에 대한 우려 등 ] 이를 알아본 부여풍이 다시 연락을 취해 모종의 책략을 제안하자 마침내 거병한다. 미리 준비한 대로 낙빈왕과 당지기 등의 동료들과 단숨에 5000의 병력을 끌고 거병하며 '''토여풍격문'''[* 부여풍의 성씨는 본래 부여씨이지만, 원 역사에서도 백제 왕을 비롯한 왕족들은 중국에 보내는 국서에 국성인 부여씨를 줄여서 여씨로 칭하기도 했으니 고증이 틀린 건 아니다.]이란 제목으로 무조와 조정에 대한 불신과 적대감을 드러낸다. 반란을 말리러 온 양주 자사를 구금하고 관아를 털어 수만으로 증강한 병사를 동원해 장강을 타고 산동반도로 향하던 급조 수군의 함대를 탈취해 백제 수군에게 도전한다. '''물론 약속대로''' 백제 수군은 적당히 싸우는 척만 하다가 진 척 하고 물러났기에 하루아침에 반 의병 반 역적에서 구국의 영웅이 된다. 이후 전국에서 몰려든 사람들을 받아들여 10만이 넘는 대군을 편성하고, 산동의 여력을 생각한다는 핑계로 다시 후방지역인 양주로 돌아가 세력을 공고히 하려 한다.[* 물론 이는 백제, 당 정규병과의 전투를 피하려 한 것이 뻔하다. 백제 수군은 오래된 함선들만 자침시켜 그 세력을 온존했고 이근행, 고간, 설인귀의 정예병 5만이 연운 16주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러나 측천무후가 연운 16주를 포기한다는 초강수를 두고, 설인귀와 3만 정병이 남하하면서 겁에 질려 백제에 조언을 구한다. 부여풍의 계책을 --또-- 받아들여 토번, 백제의 침입 와중에 의병과 관군이 싸우면 안 된다는 격문을 사방에 돌리며 여론의 지지를 얻는다. 그러면서 실패를 대비해 수군 함대를 모아 백제를 막는다는 핑계로 도망갈 준비를 한다. 일단 세력과 재산을 가지고 싸우는 척 하다가 설인귀와 측천무후 탓에 어쩔 수 없다고 둘러대면 끝까지 자신의 명예는 지킬 수 있다고 계산한 것.[* 여담으로 부여풍의 평가와 속마음을 서술하는 해설에서는 서경업은 나름 대의와 애국심이 있던 궐기 이전과는 달리 권력이 보이게 되자 이제는 자기 안위와 출세만 생각한다고 묘사된다. 그런 그와는 달리 동료인 낙빈왕과 당지기는 여전히 대의를 믿고 중요한 순간에 목숨을 내걸고 움직인다. 정작 서경업은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런 부하들이 처형당하면 민심이 들고 일어나서 도와주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그 자신도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민심의 동요로 인한 전세 역전이 설인귀가 초주까지 남진한 시점에서 --기적적으로-- 정말로 벌어지면서 남중국의 천명이 보이게 된다. 그에게 매료된 초주 자사가 방심한 설인귀를 인질로 잡아 남하를 막고 당지기가 이를 확인하는 데 성공한 것. 이미 장안 조정은 토번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있었기에 이를 구하기 위해 당의 동도, 낙양으로 진군한다.[* 이 시점에 토번에게 사정없이 얻어맞아 너덜너덜해진 장안 조정을 능가하는 민심 장악과 군사력을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명분을 버리는 순간 성난 동지들에게 맞아죽을까봐 대의를 끝까지 밀고나가야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그래서 본인도 이제와서 토번과 백제의 정병들과 싸우는 자살행위를 벌여야 하는 당의 권신 자리보다는 남중국 왕조 개창이 더 욕심나지만, 대의명분을 밀고간 덕에 능력으로서는 안될 불가능한 성공을 거둔 탓에 도박수를 던지는 심정으로 낙양으로 향한다.] 그런데 부여풍이 대운하를 이용해 낙양 인근에 대군을 이끌고 빠르게 집결하여 압박을 가하자 그의 의용군 세력은 공황상태에 빠진다. 부하들의 진심어린 걱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동생 이경헌과 '''단둘이''' 백제 군영을 찾아가 군량과 재물 일부를 제공하는 대가로 후방의 안전을 보장받는 담판을 짓는다.[* 부하들은 총대장이 직접 협상에 나선다는 것에 경악하며 호위할 800기를 준비하겠다고 했지만 서경업은 부여풍이 자신을 죽일 생각이라면 호위병이 있다 해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며 동생만 데려간다. 물론 이는 부하들에게 부여풍과의 모종의 밀월 관계를 들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경헌은 둘 간의 전령으로 활동하며 이미 그 내막을 알고 있었다. 부여풍은 이를 보고 서경업이 원 역사에서 위구르와 담판을 지었던 '''[[곽자의]]'''를 따라하는 거냐며 조소한다. ~~중화주의 관점에선 "오랑캐" 위구르를 저지한 곽자의나 백제를 저지한 서경업이 같은 취급을 받을지도?~~] 이후 낙양을 벗어나 설인귀를 데리고 장안 수비군에 합류하여 측천무후에게 --냅다 좋다고-- 사면령을 받으나 직위가 설인귀보다 아래인 부대총관으로 임명받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 그러나 부여풍이 동관으로 진출하며 서경업이 백제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장안에서 빠져나오도록 도와주고, 동관에서 대치만 하다가 남쪽으로 퇴로를 열어주어서 또다시 살아남는다. 당의 일부 중신들이 잔존병력을 데리고 토번군의 공격을 피해 동관방향으로 달아났기에 그들까지 거두었을지도. --인생은 서경업처럼-- 제당 전쟁이 끝나고 당의 몰락이 가속화되자 스스로 양주 금릉에서 제위에 올라 양(梁)나라를 세운다. 그의 왕국은 약 200여 년간 지속되었고 이후 북중국을 통일한 송나라에 멸망당해 흡수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